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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 원주교구장 지학순 다니엘 주교 선종 30주기 추모미사 (가톨릭신문2023.3.19)/ 지학순주교님을 기억하며(가톨릭신문 기사모음)
    • 작성일2023/03/11 17:40
    • 조회 957

     

          가톨릭신문 2023.3.19 [제3335호, 8면]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 고(故) 지학순 주교(다니엘·1921~1993) 선종 30주기 기념행사가 3월 11일 제천 배론성지와 원주가톨릭센터에서 열렸다.

    이날 배론성지 최양업 신부 기념 대성당에서 원주교구장 조규만(바실리오) 주교 주례로 추모미사가 봉헌됐으며, 이어 원주가톨릭센터에서 지학순 주교의 일대기를 조명하는 칸타타 ‘빛이 되라’ 공연, 지 주교의 복지활동과 벽지보건 사업에 초점을 맞춘 심포지엄이 이어졌다.

    원주교구는 지 주교 선종 30주기 행사를 통해 지 주교가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에 남긴 발자취를 되새기면서 그의 사목 정신을 오늘날 되살릴 것을 다짐했다.

    ■ 지학순 주교 선종 30주기 추모미사 봉헌

    지 주교 선종 30주기 추모미사는 오전 11시 조규만 주교가 주례하고 교구 총대리 곽호인(베드로) 신부 등 사제단이 공동집전했다. 더 없이 화창한 날씨를 맞아 원주교구 신자는 물론 지 주교를 기억하는 타 교구 신자들과 송기헌 국회의원 등 원주 지역 정관계 인사들도 추모미사에 참석례다.

    조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돌아가신 지 30년이 된 지학순 주교님께서는 교회의 목자로서, 대한민국의 선구자, 지도자로서 참으로 많은 일들을 하셨다”며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 용감하게 불의에 맞서는 양심선언으로 대한민국 민주화에 큰 획을 그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사업과 장애인 재활사업, 여성근로자 권익사업 등 우리 사회를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지 주교님이 우리나라 사회복지와 민주화운동 분야에서 이 나라 모든 국민들을 당신의 자녀처럼 생각할 수 있었던 배경은 지 주교님이 오늘 복음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를 감싸 안았던 아버지를 닮으려고 노력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밝혔다.

    미사 중 영성체 후 묵상 시간에는 지학순 주교가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아 옥고를 치르며 발표했던 “사랑은 헐벗고 버림받은 사람을 잊지 못하는 눈물이어야 하고, 정직하고 두려움 없이 양심껏 말하다가 투옥되어 고통 중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저버리지 못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이어야 한다고 믿는다”라는 메시지가 낭독됐다. 미사 후에는 추모미사 참례자들이 배론성지 성직자 묘지 내 지학순 주교 묘소를 찾아 위령기도를 바쳤다.

    송기헌 국회의원은 “지학순 주교님은 원주의 정신이자 원주의 뿌리이고 한국사회의 양심이셨던 분”이라며 “저는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학창시절부터 항상 지 주교님을 존경해 왔기 때문에 오늘 추모미사에 참례했다”고 말했다.

    1970년대 지 주교와 함께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에 힘썼던 장덕기(바오로·71·원주 영산본당)씨는 위령기도를 바친 후 “지 주교님은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에 큰 관심을 가지시고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면서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법이 제대로 없던 시절에 억압받는 노동자들의 권익과 인권 향상에 누구보다 앞장서셨다”고 회고했다. 아울러 “지금은 물질적으로 풍족해진 시대이다 보니 지 주교님이 남기신 정신이 점점 잊히는 것 같아 아쉽다”고 덧붙였다.

    지 주교 선종 30주기 추모미사는 오전 11시 조규만 주교가 주례하고 교구 총대리 곽호인(베드로) 신부 등 사제단이 공동집전했다. 더 없이 화창한 날씨를 맞아 원주교구 신자는 물론 지 주교를 기억하는 타 교구 신자들과 송기헌 국회의원 등 원주 지역 정관계 인사들도 추모미사에 참석례다.

    조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돌아가신 지 30년이 된 지학순 주교님께서는 교회의 목자로서, 대한민국의 선구자, 지도자로서 참으로 많은 일들을 하셨다”며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 용감하게 불의에 맞서는 양심선언으로 대한민국 민주화에 큰 획을 그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사업과 장애인 재활사업, 여성근로자 권익사업 등 우리 사회를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지 주교님이 우리나라 사회복지와 민주화운동 분야에서 이 나라 모든 국민들을 당신의 자녀처럼 생각할 수 있었던 배경은 지 주교님이 오늘 복음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를 감싸 안았던 아버지를 닮으려고 노력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밝혔다.

    미사 중 영성체 후 묵상 시간에는 지학순 주교가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아 옥고를 치르며 발표했던 “사랑은 헐벗고 버림받은 사람을 잊지 못하는 눈물이어야 하고, 정직하고 두려움 없이 양심껏 말하다가 투옥되어 고통 중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저버리지 못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이어야 한다고 믿는다”라는 메시지가 낭독됐다. 미사 후에는 추모미사 참례자들이 배론성지 성직자 묘지 내 지학순 주교 묘소를 찾아 위령기도를 바쳤다.

    송기헌 국회의원은 “지학순 주교님은 원주의 정신이자 원주의 뿌리이고 한국사회의 양심이셨던 분”이라며 “저는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학창시절부터 항상 지 주교님을 존경해 왔기 때문에 오늘 추모미사에 참례했다”고 말했다.

    1970년대 지 주교와 함께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에 힘썼던 장덕기(바오로·71·원주 영산본당)씨는 위령기도를 바친 후 “지 주교님은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에 큰 관심을 가지시고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면서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법이 제대로 없던 시절에 억압받는 노동자들의 권익과 인권 향상에 누구보다 앞장서셨다”고 회고했다. 아울러 “지금은 물질적으로 풍족해진 시대이다 보니 지 주교님이 남기신 정신이 점점 잊히는 것 같아 아쉽다”고 덧붙였다. 

     

    가톨릭신문기사:  발행일 | 2018-03-11 [제3085호, 12면]

    고(故) 지학순(다니엘) 주교(1921~1993)의 삶과 신앙을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말은 ‘빛’이다.

    교회 안에서는 물론 한국사회 전체의 인권과 사회복지 분야에서 지학순 주교는 어두운 세상을 비추고 다른 빛을 이끌어 내는 첫 빛으로 살았다.

                               지학순 주교 문장.

     

    ■ 인권의 ‘빛’으로

    ....... 지 주교는 1965년 3월 원주교구가 춘천교구로부터 분리, 설정되면서 초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된 뒤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의 폭압에 정면으로 맞서 저항하며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이 됐다. 1971년 10월 원주교구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들과 함께 원주 원동성당에서 3일간 열었던 ‘사회정의 구현과 부정부패 규탄대회’는 한국교회가 정치적 발언에 뛰어든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

    지 주교는 1973년 11월에는 서울 YMCA에서 반독재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지식인 선언’에 서명, 참여하면서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감시의 눈초리를 받았으며 마침내 1974년 7월 6일 해외에서 귀국하던 김포공항에서 긴급조치 1호, 4호 위반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고 만다.

    1975년 2월 17일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된 후 이틀 뒤인 19일 환영인파와 원주 시가지를 걷고 있는 지학순 주교.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주교회의는 지 주교 연행에 항의하며 같은 해 7월 10일 “정의의 실천은 주교들의 의무”라는 내용의 발표문을 내고 지 주교 지지를 선언하자 정부는 이튿날 지 주교를 풀어줬다. 한 차례 고초를 겪은 지 주교의 정의와 인권을 향한 외침은 오히려 더 커졌다. 그는 1974년 7월 23일 오전 서울성모병원(현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마당에서 “유신헌법은 진리에 반대되고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며 공판을 위해 비상보통군법회의에 출두할 수 없다”는 양심선언과 사건과 관련된 비망록을 내외신 기자와 신자들 앞에서 발표했다.

    박정희 정권에 충격을 던진 이 양심선언으로 지 주교는 그날 바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그해 8월 9일 징역 15년에 자격정지 15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 선고가 내려지자 전국적으로 사제들과 평신도들의 양심선언, 유신철폐와 인권회복을 촉구하는 기도회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1974년 9월 24일에는 1970~80년대 암울한 군사정권 아래서 민주화의 등불 역할을 맡았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원주 원동성당에서 결성되기에 이른다. 정의구현사제단 결성으로 지 주교 석방과 인권회복을 요구하는 시국선언과 기도회는 더욱 거세게 전국적으로 이어졌고 1975년 2월 17일, 지 주교는 800여 명의 환영인파가 몰려든 가운데 서울구치소를 나와 2월 19일 10개월 만에 원주교구로 복귀했다. 지 주교는 1993년 선종하기까지 원주교구장으로 봉직하며 험난한 민주화의 길을 헤쳐 나가는 한국사회에서 정신적 지주로 존재했다.
     

    젊은 시절 지학순 주교(앞쪽)와 김수환 추기경.

     

    ■ 사회복지 분야에도 족적 남겨

    지 주교가 한국교회와 사회에 남긴 또 하나의 커다란 발자취는 사회복지 분야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사회복지에 대한 지 주교의 기여는 복지기관 설립과 운영뿐만 아니라 군사목과 교육사업에까지 두루 미쳤다. 그가 사회복지 사업에 남다른 열정을 가졌던 이유는 북한(평안남도 중화군 청학리)에서 태어나 해방과 분단, 6·25전쟁이라는 격동기에 남한으로의 탈출과 체포, 수감, 재탈출, 참전과 부상 등 죽음을 넘나드는 체험을 통해 인간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지 주교는 원주교구장 착좌 후 우선적으로 육영사업의 필요성을 느껴 1967년 9월 원주에 진광중고등학교를 설립해 청소년들의 전인적 교육에 힘썼고 1968년에는 천주교 군종신부단 총재로 취임했다.

    1970년 3월 학교법인 진광학원 안에 협동연구원을 설치해 강원도 내 신용협동조합을 보급, 육성했던 사업은 가톨릭교회 협동조합 운동의 선구자적 모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1982년 1월 원주 가톨릭센터에 가톨릭의원을 개설해 빈민들의 결핵치료를 도왔다. 1984년에는 한국가톨릭맹인선교회와 한국가톨릭아동복지협의회 담당 주교로 사목했고, 1988년 6월 사회복지법인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를 설립해 사회복지 사업의 기반을 튼튼히 다졌다. 실향민이기도 했던 지 주교는 1985년 9월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사업에 참가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1987년 4월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고문을 맡아 민족화해와 통일운동에 힘을 쏟았다.
     

    1974년 7월 23일 양심선언 후 서울성모병원 마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묵주기도 바치고 있는 지 주교.

     

     

    [목자의 24시] 8. 지학순 주교  가톨릭신문 발행일1976-10-24 [제1030호, 1면]

    사회에 봉사하는 교회상 심기에 부심 / 교구청 몰라도 주교 처소 아는 운전사

    지학순 주교-. 국내에서나 국제적으로 명성 높은 주교다.

    원주 고속버스 터미날에서 택시를 타고「천주교 원주교구청」으로 가자고 일렀더니 머리를 갸우뚱하던 운전수가 『지학순 주교님이 계시는 곳』이라고 하자 금방 알아들었다.


    지 구교는「최고의 자선은 사회 정의 구현」이라 외쳤을 땐 정의 기수로 추앙 받았고 뜻 밖의 옥고를 치룰 땐 「동양의 민첸티」로 불리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원주교구에선 이 같은 거창한(?) 이름이 아니라「할아버지」라는 친근한 별명이 통용되고 있었다. 교구청에 도착하니 마당을 쓸고 있던 김지석 신부가 사무처 응접실로 기자를 안내했다. 지 주교는 부재 중이었다. 우선 교구청 분위기가 풍기는 깊은 인상은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차별」은 커녕「구별」조차 없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개방적이었고 출입이 자유스러웠다.


    원주교구만큼 사목 전반에 걸쳐 평신도가 깊이 참여해 있는 교구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교구 산하 기관의 직원에 대한 인사문제와 처우 및 사제의 생활비 문제까지 거론하는 「교구 인사위원회」가 주교와 성직자 2명 평신자 2명으로 구성돼 있는 사실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지 주교와 같이 일을 해본 사람이면 누구든지 국수나 짜장면으로 점심을 함께 먹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지 주교는 교구청에서 평신도가 압도적으로 많은 교구 사목위원회나 기관장 회의를 열 때는 교구청 식장에서 함께 식사를 하게 한다. 1년에 한 번씩은 교구 산하기관의 직원들을 모두 교구청 회식에 차례로 초대, 노고를 치하하고 격려하는가 하면 꾸르실료를 했을 때도 수고한 임원들을 초대한다.

    이처럼 지 주교는「아무하고나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사랑과 정신의 일치뿐 아니라 행동과 삶의 일치를 함께 도모한다. 바로 이 점에서도『주교와 성직자와 평신도가 일치 단결해 있다는 것은 원주교구의 가장 큰 자랑』(김 추기경의 원주교구 창설 10주년 경축사)임을 실감할 수 있다. 원주교구의 관할 구역은 인구 10만 미안인 원주시가 유일한 도시이고 대부분이 가난한 산골과 광산지대, 그리고 동해안의 어촌들이다. 이처럼 어느 교구보다 어려운 여건에서 교구와 본당이 소속 자립하며 이웃을 돕는 일에 앞장서고 한국 교회 최초의 가톨릭센타와 방송국까지 갖게 된 것은 기적 같은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발전은 지 주교의 교구민에 대한 목자적 사랑과 역량, 평신도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 노력의 결정이라 하겠다. 요즘도 원주교구 교육원에선 청년 장년 부인 또는본당별로 평신자의 의식을 계발하는 교육을 계속하고 있다. 지 주교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사회에 봉사하고 사회를 구해가는 교회상을 심어왔고 또 심고 있다. 교구 본부에 재해대책위원회가 상설돼 있어 필요한 곳에는 언제든지 봉사와 사랑의 손길을 뻗어 주고 또한 봉사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좋은 일을 하면 돈이 생긴다」는 신념을 가진 지 주교는 재해가 발생하면 대책위원회 찝차로 현장을 답사한 후 대책을 세운다 원주 시내 본당과 교회기관은 자전거를 타고 순시하면서 교구민의생활형편도 직접알아본다. 교통순경들은『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교통신호를 지키는 사람은 지 주교님밖에 없다』면서 감탄한단다. 지 주교는 그처럼 준법정신이 강하다.그러나 원조관계로 누구보다 외국 교회와 접촉이 많아야 할「인성회」총재인 지 주교에게 출국이 금지된 현실은 참으로 아이러니칼하다. 각 본당 사정은 매월 본당 신부와 사목회장이 날인한 보고서로 재정 집행 사항 등을 보고 받기 때문에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단다.

    지 주교의 일과는 오전 7시30분 교구청 직원들과 함께 봉헌하는 미사로 시작되고 저녁 10시에 끝난다. 점심식사 후엔 잠시 쉬는데 공식 스케줄이 없을 땐 반바지에 맥고모자를 쓰고 맨발로 교구청 구내의 화단과 과수원에서 김 매기를 한단다. 그렇게 일하는 모습이 하도 부지런한 농사꾼 같아서 언젠가 교구청에 들른 외국인 신부가 창 밖을 내다보며『본당에 잡역부가 필요한데 저 할아버지가 좋겠다』고 말한 일이 있단다. 지 주교는 낭비에 질식하는 성미라 용지의 앞면을 쓴 후 버리지 말고 뒷면까지 쓰게 하며 자동차도 차고 앞에 대게 하고 꾸러미를 묶는 끈은 곱게 풀어 다시 쓰게 할 정도란다. 운동으론 방 안에 매달아 놓은 운동기구로 실내운동을 하고 가끔 구내 정구장에서 정구를 친다는데 옥 중에서 얻은 신경통은 이제 완쾌된 것 같고, 식사는 단 것 외엔 가리지 않는다. 평신자인 K씨는『잘못이 있으면 그것을 합리화하려 들지 않고 즉각 사과하는 데 호감이 갔다』면서 지 주교의 인품의 일면을 설명하기도 했다. 무한히 존경은 하지만 그대로 따를 수 없는 도승(道僧) 같은 지도자가 있고, 존경을 하면서 동시에 따를 수 있는 중생(衆生)의 지도자가 있다면 지 주교는 분명히 그 후자일 것이다.

     

     

    [주교님 탐방] 7. 원주 교구장 지학순 주교 가톨릭신문 발행일1987-02-01 [제1541호, 8면]

    “어린이용성경 빨리 나왔으면”/ 북에 있는 친척 만나는게 소원 /“아침 저녁 15분씩 기도하셔요” 

    때아닌 겨울비가 내리던 지난 1월 16일 오후3시 원주 보안동본당 김인후(원주국 6) 학성동본당 송진성(우산국 5) 일산동본당 원찬식(중앙국 5) 단구동본당 이주현(명윤국 6) 태장동본당 이진희(우산국 6) 원동본당 정지헌(일산국 6) 어린이 등 6명이 학성동에 있는 주교관을 방문원 주교구장 지학순 주교님을 만났다.

    - 안녕하세요, 주교님. 이렇게 가까이서 뵙기는 처음입니다. 지난번 TV를 통해 주교님 고향이 이북이라는 것을 알게 됐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시게 됐나요?
    ▲신부가 되려고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1949년 공산당이 신학교를 없앴어요. 공산당은 천주교를 싫어하잖아요. 어쩔 수 없이 남쪽으로 피난해 내려와 공부를 해서 신부가 됐지요. 내 고향은 평양에서 17km 떨어진 「중화」라는 곳이지요.

    - 금강산엔 가보셨나요.
    ▲못가봤어요. 신학교에서 갈뻔했는데…

    - 지금 저희들은 겨울 방학 중이거든요. 주교님은 어린 시절 겨울방학 때 주로 무슨 놀이를 하셨어요?
    ▲이북은 여기보다 굉장히 추워요. 썰매도 타고 눈싸움도 하고. 그리고 팽이치기, 자치기, 연날리기 등도 하면서 자랐어요.

    - 형제들과 싸움은 안했나요?
    ▲옛날에는 지금처럼 먹을 것이 풍부하지가 않았어요. 배가 고프니까 서로 먼저 먹으려고 하다 싸우곤했어요. 우리 집에 사과밭이 있었는데 따 먹으면 부모님한테 혼나니까 떨어진 것을 먼저 주우려고 하다가 싸운 적도 있어요.

    - 주교님이 어렸을 때와 현재 저희 어린이들을 비교해보면 어떤 면이 다른지요?
    ▲옛날 어린이들은 어른을 어려워할 줄 알았어요. 어른이 지나가면 옆으로 비켜서고 인사도 곧잘했어요. 그런데 지금 어린이들은 안 그래요. 본당에 나가도 인사하는 어린이들이 별로 없어요.

    - 신부가 되려면 오래 걸린다고 하던데 몇 년이나 걸리나요.
    ▲과거에는 신부가 되기 위해선 12년이 걸렸는데 지금은 빠르면 6년이면 돼요. 소신학교(현재 중학교)때는 부모님이 보고 싶어 운적도 여러번 있었어요.

    - 신부되길 잘했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여요?
    ▲불쌍한 사람도와주고 병원비 없는 사람 병원비도 주고 감옥에 있는 이들도 도와주고 또 인권ㆍ사회정의운동을 할 때여요. 여러분도 친구가 아프면 찾아가 위문하겠지요.

    - 주교님은 매일 성경책을 읽나요?
    ▲물론이지요. 여러분은 잘 안 읽지요. 지금 어린이용 성경책이 없는게 문제이긴해요.

    - 하루 기도시간은?
    ▲2시간 이상 기도해요.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그리고 여러분을 위해.

    - 우리 어린이들은 하루 기도시간이 어느 정도면 바람직하겠어요?
    ▲아침ㆍ저녁 15분씩하면 좋겠어요. 덮어놓고 빨리할게 아니라 지금까지 놀던 생각을 모두 없애고 천천히 하세요.

    - 혹시 시험 때 벼락치기공부를 해보신 적은 없어요?
    ▲평소에 공부하기 때문에 밤새운 적은 없어요. 성적은 좋은 편이었고요. 특히 작문(글쓰기)을 좋아했어요. 여러분들은 편지를 자주 쓰나요? 어린이들에게서 편지를 받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 잘 안써요. 앞으로 주교님께 자주 편지 쓰도록 노력하겠어요. 저희들이 이곳에 찾아와도 되나요.
    ▲그럼, 언제든지 오면 만날 수 있지요.

    - 저희들에게 해 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슨 일을 하든지 열심히 하세요. 거짓말을 하지 말고. 남을 속여 돈을 벌면 소용없어요. 그런데 착하게 자라야 할 여러분에게 사회에서 거짓말을 가르치는 것 같아 안타까와요.

    - 끝으로 소원이 있다면요?
    ▲가장 큰 소원은 고향에 가서 친척들을 만나보고 싶은 거여요.

    - 주교님, 오늘 저희들을 위해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도 여러분을 만나서 기뻐요. 빗길에 조심해서 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