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기획피정
- 작성일2024/08/17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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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기획피정에는
조규만 바실리오주교님(원주교구)이 동반해주셨습니다.
성모님애 대해서... 세 번의 강의로 만나게 된 이야기들은
기도학교 설립의 취지를 담고 있는 '은총의 성모마리아 기도학교 기도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
제 1강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그 정당성이 무엇인지......
제 2강의는
성경에 나타난 성모님의 모범적인 신앙과 삶에 대하여
8월 배론의 순교자들 이야기는 최초의 신학교이며 조선최초의 근대 신학 교육기관이었던
성요셉 배론 신학당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정규하신부의 배론신학당 방문 1931년(서울가톨릭대학교 홈피참조)
1853년 2월 3대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님이 선종하시자 1852년에 입국하여 사목하던 매스트로 신부님이 조선 선교지의 대목구장 직무 대행직을 수행하셨습니다. 당시 활동하던 성직자는 매스트르(47세), 다블뤼(37세), 최양업(34)신부님 세 분이셨고 그 중 나이가 가장 많으셨던 매스트르 신부님이 새 대목구장 부임전까지 대목구를 이끌어가셨습니다.
매스트르 신부님은 당시 국내에서의 신학생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시고 1855년 초 배론에서 장주기 요셉회장님이 제공한 3칸 짜리 초가집에서 신학교를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6명의 신학생이 공부를 했고, 이후 56년 입국한 베르뇌 주교님은 함께 입국했던 푸르티에 신부님을 교장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배론 신학교'라고 불리다가, 베르뇌 주교님이 1861년 10월에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성모께 조선 교회를 봉헌하면서, 선교사들이 사목하던 각 구역이 성모님의 축일 중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이 때 신학교를 '성 요셉 신학교'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교육과정을 보면~~
1856년 푸르티에 신부님이 부임하셨을 당시 교수진은 두 명 이었습니다. 푸르티에 신부님과 집 주인 장주기 요셉.^^
푸르티에 신부님은 라틴어를 가르치셨고 장주기 요셉 회장님은 신학생들에게 한문, 그리고 푸르티에 신부님에게는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교육 과정은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 교육 과정에 맞추어져 있었겠지만 교수진의 부족으로 원하는 대로는 편성하기 어려웠던 사정이라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1857년 베르뇌 주교님은 신학생들 양성 비용에 대하여 보고하셨는데, 신학생 4명과 예비 신학생 9명이 숙식과 교육을 따로 진행했답니다. 박해로부터 신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학생들을 몇 명씩 짝지어 여러 집에 분산하여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이 신학교에는 많은 정성과 관심이 기울여졌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신 조선 교회의 지출 내역을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 전교회와 성영회 등에서 24,000프랑을 지원하였는데, 1857년 신학생들을 위해 2,500프랑이 지원되었기 때문입니다.(12.5%)
1861년 4월 페낭 신학교로 유학생활을 했던 이 바울리노가 귀국하여 편입함으로써 신학교는 대신학교 과정(수사학, 철학반, 신학반)을 개설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교수 신부님이 더 필요하게 되었고, 1862년 휴양 중이던 프티니콜라 신부님이 라틴어 담당 신부로 오시고 1862년 수사학 과정 3명은 철학반으로 진학, 6월 말에 입국한 임 빈첸시오와 김 요한은 그 해 여름 베르뇌 주교님과 다블뤼 주교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사제 성소와 학업 성과에 대하여 평가 받은 후 배론 신학교에 편입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김 요한은 신학교를 떠났고, 임 빈첸시오와 이 바울리노가 각각 소품과 삭발례를 받음으로써 배론 성요셉 신학교를 통하여 처음응로 성직자가 탄생되었습니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가 터집니다.
2월 28일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심부름꾼이 도착하고 신학생들이 '주교도 잡히셨다 하니, 군란(박해)은 크게 났습니다. 신부 피하시고 재물과 책, 문서도 감추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건의하자, 건강마저 몹시 않좋으셨던 푸르티에 신부님은 '주교 잡히셨는데 살아 무엇하겠느냐? 주명(主命)이나 바라자. 물건도 치우지 마라'고 대답하셨답니다. 결국 배론을 덮친 포졸들에게 잡히게 되었고 제천으로 압송...., 두 신부님은 서울로 압송되었고, 많은 고문 끝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셨으며 현재 두 신부님의 무덤은 명동 성당 지하 경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파견미사... 집으로 돌아가는 퇴실절차..... 강복해주시는 주교님~~^^